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 시드 (문단 편집) === 사후 === 히메나는 엘 시드의 죽음을 성의 민중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히메나는 남편의 시신을 바비에카 위에 앉혀 놓고 그의 칼인 티소나를 그의 주먹에 쥐어 주었다. 그러고는 발렌시아의 성벽 위에 올려 놓았다. 다음날 병사들은 부상을 심하게 입은 엘 시드가 무장을 하고 성벽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알폰소 6세는 참패하였고 결국 발렌시아는 함락되었다.[* 영화《엘 시드》에서는 엘 시드 사후 유수프가 패하고 전사하여 그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으로 나오고 게임《[[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선 발렌시아를 사수해 엘 시드의 아내 히메나가 성주가 되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다.] 알폰소 왕은 전투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에게 엘 시드의 죽음을 공표하였고 그의 시신을 땅에 묻지 말라고 명했다. 당시에 시신을 땅에 묻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구국영웅]]'''이란 것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rgos_-_Catedral_069_-_Tumba_del_Cid.jpg]] 히메나는 엘 시드의 시신과 함께 당시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부르고스로 피난가서 살다가 나중에 함께 부르고스 대성당에 합장되어 무덤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카스티야의 수도는 이후 새로운 정복지였던 [[톨레도]]로 옮겼다가 15세기 후반에 잠시 [[바야돌리드]], 그 이후 다시 톨레도로 갔다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정치적 통합 이후 신생 [[스페인]]의 수도가 [[마드리드]]로 정해지면서 지금까지 내려온다. 실제로 혹이나 스페인 관광을 간다면 이 순서로 여행을 하면 대충 [[레콩키스타]] 시절의 중세로부터 현대 스페인이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 잘 느낄 수 있다.] 발렌시아는 1124년에 [[아라곤 왕국]]이 탈환할 때까지 25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 하에 있었다. 엘 시드는 당시에 유일하게 [[아랍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지금도 [[스페인인]]들은 그를 존경한다. 스페인의 명고전인 [[서사시]]《나의 시드의 노래(Cantar de Mío Cid)》에서는 두 자루의 검을 묘사했는데, 그 검들은 각각 '콜라다'와 '티소나'라고 불리었으며, 티소나는 모로코의 군주인 부카르와의 전투에서 이겨 그를 죽이고 얻은 검이며, 콜라다는 바르셀로나 백작 베렝게르를 이기고 얻은 검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작품 후반부에 티소나는 신하인 페로 베르무데스에게, 콜라다는 마르틴 안톨리네스에게 하사하게 된다. [[비트매니아 IIDX]]와 [[기타프릭스]] & [[드럼매니아]]에 수록된 곡인 [[Tizona d'El Cid]]는 '''엘 시드의 티소나'''라는 뜻이다. ~~태클을 걸자면, d'El은 옳지 못 하다. de와 정관사 el이 붙으면 그대로 del이지 부호를 따로 붙일 필요는 없다.~~ || [[파일:external/www.tienda-medieval.com/Espada-Colada-para-Bodas-419x450.jpg|width=300]] || || 콜라다의 복원품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izona.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rde%C3%B1a_tumba_babieca_03320.jpg]] 콜라다는 사라져버렸고, 티소나는 [[부르고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15세기에 제작된 복원품이다.[* 도신에 TIZONA 라고 각인되어 있는데, 엘 시드가 활약하던 시기엔 티손(Tizón)이라고 불리었기에 [[고증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애마 바비에카의 무덤도 산 페드로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